예지동 골목, 자본에 휩쓸려 명멸하는 민중의 역사
서울 종로구 예지동 220걸음 길이…50년 역사 묵은 카메라 즐비
2009-12-17 00:00:12 [ 이슬 기자 ]
ⓒ뉴스한국
소멸 직전의 서울 종로구 4가 예지동 카메라·시계 골목은 부산스러움과 적막감이 동시에 감돈다. 백발의 늙은 장사꾼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지키고 있는 보석·시계 노점상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된 카메라가 즐비한 가게들로 이어진다.
1미터 보폭으로 220걸음이면 끝에 다다르는 골목의 나이는 50년이 조금 넘는다. 카메라가 재산 목록 1호였던 시절 어찌어찌 외국에서 가져오거나 월남전 후 들여온 것들이 이곳을 통해 거래됐다. 전성기를 누릴 무렵 이 짧은 골목 안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어깨와 어깨가 부딪쳤다. 전시하기 무섭게 팔려 나간 카메라는 고장이 나거나 내다 팔릴 때 이곳으로 다시 모였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은 노쇠했다. 2, 3층 건물이라도 지금은 1층만 상점으로 사용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골목은 나이를 먹었고, 늙은이처럼 힘이 빠졌다.
5, 6년 전부터 골목을 매끈하게 닦아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는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몇몇 가게
는 인근 충무로와 남대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가 빠진 것처럼 몇몇 가게는 셔터를 내렸다. 22개에 달하던 카메라 가게는 15개로 줄었다. 찾는 이들이 줄면서 상권이 죽어가고 있다. 재개발도 없이 1년만 더 버티면 절반 이상이 아사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지루하게 끌어 오던 재개발 계획이 내년 초부터 본격화될 전망이다. 남아 있는 가게는 내년 1월까지 길 건너 옛 전매청 자리로 옮겨야 한다. SH공사에서 임대료를 내주겠지만 관리비는 알아서 해야 한다.어떤 이들은 이참에 아예 카메라 가게를 그만 둘 생각이다.
골목 끝에 위치한 ‘작은풍경’으로 들어서자 벽면에 오래된 필름카메라가 빼곡하다. 29년 동안 한 자리에서 카메라를 팔고 수리한 그에게 골목의 소멸은 가슴 아리다. 카메라 가게를 어디로 옮기는 것이 대수일까. 50년 세월이 만들어낸 민초의 역사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가게 주인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제멋대로 그리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씁쓸해 한다.
ⓒ뉴스한국‘태양사’라고 적힌 투박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백발의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 미놀타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다. 3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이봉근(85) 할아버지는 “생전에 이곳에서 일하며 가정을 이끌고 자식을 키웠는데 내가 죽기 전에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후세들이 마음껏 뛰어 놀고 즐겨야 하지 않겠느냐며 변화를 긍정한다.
인터넷 블로거들 사이에서 카메라 수리 잘하기로 소문난 윤이식(40) 씨는 할 수만 있다면 이 골목에서 끝까지 카메라를 만지고 싶지만 거대한 시대 변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이건욱 학예사는 예지동 골목이 민중의 역사라고 말한다. 역사책에 기록되진 못하지만 사람 냄새가 배어있는 민초의 터인 셈이다. 그는 “문화와 역사,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의 향유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접점을 찾으면 분명히 답이 나올텐데, 이대로 두면 우리 역사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고 말한다.
오후 5시를 넘겨 땅거미가 지자 하루 온종일 찬바람 맞으며 시계 노점상을 지키던 늙은 장사꾼들이 들어갈 채비를 한다. 5년째 노점을 지키고 있는 일흔 다섯의 한 할아버지에게 조만간 예지동 골목이 사라져 서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헛것이지, 그럼 다 헛것이지”하며 허허 웃는다.
서울 시내 한 구석에 자리한 소시민의 역사가 반짝 네온처럼 명멸한다. 사람 냄새 지워진 이 거리에는 조만간 외국 향수가 뿌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