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지은] '부자’ ‘재벌’ 의 이미지로 분류되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60%에 육박하자 범여권 대선 후보들은 ‘가난 마케팅’으로 맞서고 있다. 5일 경선 컷오프에 통과한 대통합민주신당(이하 신당) 소속 5명의 후보는 각종 매체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저마다 ‘찢어지게 가난했다’‘힘들게 성장했다’며 어린 시절 고생담을 잇따라 털어놓고 있다. 선두인 이명박 후보의 이미지를 역이용해 서민 표(票)를 자신의 텃밭에 심겠다는 포석이다.
◇가난한 사연도 가지가지=신당의 예비 후보 경선 컷오프를 통과한 5명 후보들이 가난을 통해 표심을 얻으려는 사연도 다양하다. ‘경기중ㆍ경기고ㆍ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면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손학규 후보. 부유층 모범생 이미지가 강한 손 후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세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지독한 가난이 시작됐다”며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험한 농사일을 하시며 똥지게를 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사연을 올렸다.
서울대 졸업, 방송기자, 워싱턴 특파원, 9시뉴스 앵커 등으로 시작해 전국 최다 득표 국회의원 당선, 집권당 의장 재선, 통일부 장관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정동영 후보. 종종 ‘귀공자 같다’는 말을 듣는 것에 대해 정 후보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홀어머니와 함께 직접 만든 옷을 시장에 내다 팔아 온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등록금 마련하기도 빠듯했으니 술 마실 돈도, 노래 부를 여유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한명숙 후보는 7월 연기군 조치원읍의 한 식당에서 열린 당원 오찬간담회에서 “이명박 후보는 위장전입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가난해서 생계형 이사를 갔고 산동네에서 물지게로 물을 날라본 적도 있다”고 했다. 유시민 후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소년 시절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고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다”고 고백했다. 이해찬 후보는 자신이 가난했다고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2일 출간한『청양 이 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에서 ‘시골에 사는 면장의 셋째 아들’을 강조하며 서민적인 이미지를 내비쳤다.
이에 질세라 이명박 후보도 ‘나의 스승은 가난과 어머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 후보는 여러 저서에서 풀빵 장사로 어렵게 중학교와 고등학교(포항 동지상고)를 마쳤고 상경해 고려대 상대에 입학했지만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근근이 학비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 정도 힘들지 않은 사람 있었나=5명의 신당 후보들이 가난했다고 말하는 시대적 배경은 1950~70년대다. 신당 후보들과 비슷한 시기를 보냈던 시민들은 “그때 그 정도 가난하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나”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별로 감동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이태호(62ㆍ서울 신림동)씨는 “정말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그 때 추억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고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 말하기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김선자(47)씨는 “'나도 한 때 가난했다'는 말에서 친근감이 느껴지기 보다는 진짜 그랬을까 의심부터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때는 ‘가난 마케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당시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는 부자 대 빈자로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서민 이미지를 내세웠던 노 후보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회창 후보는 “어렸을 때 가난해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6ㆍ25 때 점심도 굶어봤다”는 등의 발언으로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가난한 척 한다’는 원성과 함께 진정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선 후보들은 왜 ‘가난 마케팅’을 선호할까. 이현우 서강대(정치학) 교수는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가난한 환경 속에서 개인의 노력으로 큰 인물이 되었다는 성공담은 예상 밖으로 많은 득표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에 상류층ㆍ부유층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기 때문에 후보들은 예외 없이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서민적인 이미지로 승부수를 던지려고 한다”고 풀이했다. 인생 역전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가 가난했던 과거와 과오를 반성하는 것으로 축약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전략 컨설팅 이윈컴 이성진 팀장은 올해 대선에서는 가난 마케팅이 별로 효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우리나라는 가난의 추억을 벗어나기 위해 경제를 살리자고 부르짖는 게 아니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위기론이 대두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 마인드를 소유한 후보를 선택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가난했던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경제 전문가로서의 리더십을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