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우종원]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이라는 책이 있다. 크기에 따라 동물이 누리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재미있는 내용이다. 포유류의 시간은 기본적으로 체중의 4분의 1승(乘)에 비례한다고 한다. 체중이 16배 무거우면 시간이 2배 늘어나는 셈이다. 코끼리와 쥐의 수명을 비교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끼리가 평생 호흡하는 횟수는 쥐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계산하자면 약 5억 번. 한 번 호흡에 걸리는 시간이 서로 다를 뿐 생명 활동의 기본은 같다는 얘기다. 따라서 코끼리가 볼 때는 짧은 생애지만 쥐가 삶을 마감할 때 느끼는 충실감은 코끼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소견이다.
체중을 보유 자원으로 해석한다면 이 이론은 인간 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할 듯하다. 예를 들어 보유한 자원이 많은 선진 사회는 일상생활도 느긋하다. 반면 개발도상의 사회는 일상의 시간 역시 빠듯하다. 우리만 해도 아직 ‘빨리빨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차이는 개인 간에도 드러난다. 옛말에 가난뱅이가 쓸데없이 바쁘다는 것이 이를 시사한다.
스스로 몸무게를 조절할 수 있다면 체중에 따라 변하는 시간을 음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체중이 결정된다면 이는 고통이랄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하는 사람은 적다. 차별 또한 극심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말 그대로 ‘신분’인 것이다.
신분＝종(種)이 달라지면 사회경제적 삶의 시간과 사회경제적 수명이 달라진다. 정규 상용직의 평균 근속 연수가 8년인 데 비해 비정규직의 그것은 2년에 불과하다. 2년 단위로 직장이 바뀌거나 취업과 실업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삶의 활력과 충실감이 얻어지기는 힘들다. 이런 사람이 3분의 1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사회가 활력 있는 사회가 될 리도 없다.
일본도 지금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비정규직이 급속히 증가한 것이다. 현재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보다는 덜 심각하다. 비정규직 3분의 2가 주부나 학생 등 파트타이머나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간제나 파견제 사원이 늘어나면서 빈곤이 대물림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런 경향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 비정규 고용을 확대시킨 주범으로 꼽히는 것이 1985년 제정된 ‘노동자파견법’과 95년 닛케이렌(일본경영자단체연맹)에 의해 작성된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이다. 하지만 전자를 만들었던 다카나시는 이렇게 단언한다. “당초의 입법 취지가 후에 왜곡됐다. 지금이라도 파견은 전문 업무에 한정해야 한다.” 후자를 작성한 고야나기는 이렇게 말한다. “본래 취지는 개인이 고용 형태를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신분의 고정화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추를 되돌리는 기업도 늘고 있다. 의류판매 체인으로 유명한 유니크로는 올 들어 5000명의 비정규직 사원을 정규직 사원으로 전환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2년 전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비슷한 방침을 밝혔을 때는 야나이 사장이 이에 반대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으로는 장기적 성장이 어렵다는 판단이 그의 생각을 바꾸게 했다. 최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여야를 불문하고 비정규직 축소 및 차별 금지를 공약으로 내건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도 7월 1일부터 비정규직보호법이 실시됐다. 하지만 이랜드 사태에서 보듯 법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과 정규직이 짐을 나눠지고 우리 사회에 ‘신분’을 만들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야 한다. 이런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자유도, 민주도 건설될 수 있다. 적어도 삶을 마감할 때 나름대로 힘껏 살았다는 충실감은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