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계절의 길목에서
[문화일보 2006-11-11 08:38:48]
가을볕을 느꼈던 어느 날, 나는 박노해의 ‘가을볕’과 마주친적이 있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가만히 나를 말린다//내 슬픔을/상처난욕망을//투명하게 드러나는/살아온 날들을’나도 가을볕을 좋아한다. 여름볕처럼 강렬하지도 않고 봄볕처럼부드럽지도 않은, 고목처럼 굳은 가을볕. 내 모든 허물과 상처를조용히 응고시켜 딱지로 만들어줄 것만 같다. 그런데 올해는 그가을볕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사방을 둘러보아도 느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아니 가을이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한낮은 이상기온으로 내내 여름의 연속이더니 느닷없이 첫눈이뿌린다. 베란다에 서서 갑자기 변한 세상을 보고 있는데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있는 아들 녀석의 전화가 온다. 엄마, 철원은 너무 추워요. 땡볕을 물리친 게 바로 엊그젠데, 이상하지 않아요?이번 휴가 땐 친구들과 함께 관악산에 올라 실컷 뒹굴기로 했는데…. 내일 새벽에는 차바퀴에 체인을 감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며 슬쩍 투정을 부린다. 어쩌면 이 가을은 내가 모르는 몸부림을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은근히 조바심이 인다.
해넘이 시간이다. 두꺼운 점퍼에 머플러까지 두르고 집을 나선다. 발길은 자연스레 산책하기 맞춤인 올림픽공원으로 향한다. 간간이 찾아가는 그곳 구석구석에서 나는 숨어 있는 가을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출렁이는 억새풀, 노랗게 달려 있는 명자열매,붉은 빛을 머금은 단풍잎…. 새삼스레 가로수의 은행나무를 힐끔거린다. 산뜻하지 않은 노란색과 채 물들지 못한 초록색 잎이 왠지 추레해 보인다.
공원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다. 나처럼 그들도자취를 감춰버린 가을을 찾아 나선 것일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벤치 끝에 걸린 시커먼 맨발바닥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탄가루를 발라놓은 듯 때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큼직한 발바닥. 덥수룩한 머리에 넝마를 두른 사내가 몸을 움츠리고 옆으로 누워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 불현듯 한기가 내 온몸을 훑어 내린다. 가년스러운 이웃들의 모습이노숙자를 둘러싸고 겹겹이 모여드는 착각에 나는 그만 주춤거린다.
자연의 불규칙한 속도에 반발이라도 하듯, 잃어버린 가을 운운했던 내 가슴속에서 뭉클하며 뜨거움이 솟구친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던가. 자연은 절대로 헛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뇌성벽력만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계절의 실종 역시 그 자체로 무언가 경종을 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0월에 우리는 이미 겨울의 입새에 들어서 버렸다.
북한의 핵실험과 신도시 계획 발표. 핵실험을 국가의 자존심으로내세운 북한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우왕좌왕한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의 지명을 돈으로 치환하고 있었다.
이제 분당·판교·검단은 더는 지명이 아니다. 먼저 보고, 먼저달리고, 먼저 ‘찜’하는 사람을 가르치는 곳이 또 대한민국의교육 현장이다. 학교에서부터 선착순 돌리기에 이골이 나야만 판교로또에서 처지지 않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처지는 사람은 언제나 겨울일 뿐이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자고 나면 치솟는 아파트 값. 성실한서민들이 내 집을 갖는 꿈은 요원한 꿈이 되어 버렸다. 벤치에서잠든 노숙자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친구, 내 이웃,바로 내 모습이다.
너른 공원에는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서쪽 하늘을 올려다본다. 느닷없이 구름덩이가 몰려와 넘어가는 해를 가려 버린다. 자그마한 다리 난간에 기대 서서 소리 없이 흐르는 개울을 바라본다. 물속에서는 여느 때처럼 잉어가 떼 지어헤엄치는데, 키 큰 백로 한 마리가 비스듬히 떨어지는 물줄기에발을 담근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머리를 숙인 백로의 긴 부리는 금세라도 물에 닿을 듯하다. 멍하니 바라보자니 문득 지난여름에 만났던 제자 K가 떠오른다.
K는 내가 새내기 교사 시절에 나를 따르던 중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목사 신분으로 캄보디아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K는 10년 만에 잠깐 귀국한 것이었다. 휘청거리는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하지만 나는 첫눈에 K의 얼굴에서 뿜어나는 빛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 애들은 한국이 천국이라고 난립니다. K의 말에 나는 캄보디아의 어지러운 현실을 떠올리면서 그래 어쩌면 그렇게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너도 식구들 고생 그만 시키고 이젠 귀국하지 그러니? 그러자 K는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전 아직 그곳에서 할 일이 많은 걸요.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을 텐데, 여전히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겠다는 K의얼굴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나는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K의 마음 깊이 자리한 희망을 보면서 그의 듬직한 등을두드려 주었다.
다리를 건너 공원의 오솔길로 접어든다. 갈참나무들이 양쪽으로빽빽하게 서 있다. 갈참나무 가지 사이로 주홍빛 기운이 스며들고 있다. 구름을 벗어난 노을이 울고 난 눈자위처럼 붉다. 나는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K에게는 그곳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희망이 있고, 그런 꿈을 품은 그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나는 미처 갈색을 띠지 못한채 말라서 오그라진 갈참나무 잎을 하나하나 마음에 심으며 걸어간다. 그리고 정성껏 채색을 하며 펴 본다. 나도 모르게 기도의말을 되뇐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김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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