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음식으로 끼니…지하도등 생활
기능사자격증 가진 전직 엔지니어도
지역 47명…여성 합하면 더 많을듯
쉼터입소 돈벌며 자립의지 키우기도

◇ 정부나 구호단체의 지원을 거부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 간섭받기 싫어하는 이들은 차라리 ‘배고픈 자유’가 낫다고 말한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 끝에 득달같이 찾아온 한파(寒波). 그 추위 속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거리의 노숙인들은 특유의 생존본능으로 ‘야생’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추위를 피해 울산역이나 노숙자쉼터를 찾아드는 이들은 전체 노숙인 중 소수일 뿐이다. 이미 거리에서의 생활이 만성화 단계에 이른 대다수의 노숙인들에게는 그나마 음식이 잘 상하지 않고, 지긋지긋한 장마도 없으며, ‘흡혈’모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겨울이 차라리 낫다.
정부는 자본주의로 잘 치장된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복지국가가 존중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거리의 노숙인들을 분리 또는 통제하거나 혹은 구호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 중엔 정부가 제공하는 무료급식과 잠자리를 거부한 채 여전히 거리를 떠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거리의 방랑자들
입동(立冬)으로부터 나흘째 되던 11월 9일 밤 10시께, 노숙인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태화강변 등지. 그들의 생활동선은 일반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깊숙한 곳에 마치 ‘이상한 나라로 가는 폴의 통로’처럼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상황1. 지난해 9월부터 울산의 만성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야간 방문상담을 벌여온 ‘두 데나리온 선교회’ A간사가 “노숙인들이 먹고 자는 공간은 따로 있다”며 기자를 안내한 곳은 중구 성남동 시내 한 복판이었다. 강북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우정지하도 콘크리트 담벼락 아래, 바닥과 천장의 간격이 불과 60㎝도 채 안돼 보이는 틈새에 때에 절은 이불 한 채와 낡은 우산이 놓여있었다. 이 곳이 노숙인의 둥지라는 증거물이다. 하지만 이 ‘집’주인은 부재 중이었다. A간사는 “음식물쓰레기로 연명하는 50~60대 노숙인이 있던 곳”이라며 “병원치료가 절실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데 객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걱정했다.
#상황2. 노숙인을 찾아 울산교, 번영교, 학성교 등지를 헤맨 지 50여 분만에 반구1동 강변일대 갈대수풀 뒤에 터를 잡은 노숙인을 첫 대면하는데 성공했다. 모기장을 쳐서 한 몸 누일만큼의 공간을 만들어낸 그는 반팔 티셔츠차림의 30대 초반이었다. A간사가 처음 야간 방문상담에 나섰던 지난해 초가을에도 이 곳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사회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마리의 떠돌이 개까지 거두고 있었다. 그 역시 무료급식소를 거부한 채 남이 먹다 버린 음식물쓰레기로 생활한다는 게 A간사의 귀띔이다.
#상황3. 밤 11시 10분께 명촌철교 아래. 띄엄띄엄 쳐져 있는 두 채의 텐트를 발견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텐트의 지퍼가 열리며 한 노숙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너편 텐트에는 여성 노숙인이 살았는데 몇 일째 보이지 않는다고 일러준다. 올해로 36세인 그는 노숙경력 2년차로 강원도 출신이랬다. 군대를 제대한 뒤 울산에 내려와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남들처럼 결혼도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아내에게 외식을 시켜주겠다며 자신의 퇴근시간에 맞춰 나오라고 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와의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섰던 아내는 교통사고로 뱃속의 아기와 함께 싸늘한 주검으로 그를 만났고, 이후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결국 노숙생활로 전락하게 됐다. 생활은 거리에서 하지만, 끼니정도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직접 번 돈으로 해결한다. 6개월쯤 전에는 취업을 위해 건강진단서를 떼러 병원에 갔다가 심근경색 진단을 받았다. 아내 곁으로 갈 날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차라리 기뻤다고 했다. 그는 “엔지니어로 일할 때 여러 개의 기능사자격증을 따놨고 아내를 위해 딴 요리사자격증까지 있다”며 “노숙생활을 정리할 어떤 계기를 기다리는 중이지만, 그런 날이 오겠느냐”며 쓴 웃음을 지었다.

■노숙인 현황
노숙자 현황파악은 민간단체나 종교단체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국실직노숙자대책종교시민단체협의회’가 파악하고 있는 노숙인 현황에 대한 가장 최근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현재 울산의 노숙인 숫자는 노숙인쉼터에 입소한 25명과 거리에서 생활하는 22명 등 총 47명. 하지만 거리 노숙인의 경우 소재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힘들 뿐만 아니라, 노숙인쉼터에는 여성노숙인이 입소할 수 없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실제 노숙인 숫자는 이보다 더 늘어날 공산이 크다.

■지원도 싫다
‘등 따시고, 뜨신 밥 먹는’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거리에서의 생활에 길들여진 노숙인들은 ‘배부른 통제’보다는 ‘배고픈 자유’를 더 원한다는 사실을.
전문가들은 노숙 생활을 6개월 이상 하게 되면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가 극히 힘들어지는 ‘노숙 만성화’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에 정부와 민간단체들은 오랜 거리생활로 자립의지가 상실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IMF 이후 노숙인쉼터를 본격 가동했다.
울산에서도 1곳의 노숙인쉼터(정부 인가시설)가 운영 중이다. 정원이 30명인 이 곳의 입소자 숫자는 11월 9일 현재 25명. 입소자들은 1회에 한해 재입소가 가능하지만, 6개월 뒤에는 이곳에서 자립해야 한다.
그러나 입소자 중 일부는 중도에 이탈, 다시 거리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쉼터에서의 생활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던 거리에서와는 달리, 아침 6시에 기상해 오전 8시30분까지는 전원 퇴실해야하고, 오후 5시에는 입실을 완료한 뒤 밤 10시에 취침하는 등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규칙은 쉼터의 존재 자체가 입소자들의 자립에 있는데다, 시간의 개념이 없었던 노숙생활의 오래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노숙인 전문가 B씨는 “만성화 단계에 이른 노숙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설에 수용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과 능력을 고려해 요양이나 치료, 재활, 자활 등과 같은 특화된 관리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희망을 찾아
노숙인쉼터에는 갑작스런 경제난으로 거리로 내몰린 노숙초년생 또는 자립에 대한 의지가 남아있는 노숙인들이 주로 찾아온다.
현재 쉼터 입소자인 김모(55)씨는 자녀를 친척집에 맡겨둔 채 돈을 벌기 위해 울산으로 왔다. 처음에는 용역일을 나가 친척집에 아이들 생활비라도 부칠 수 있었지만,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는 ‘돈줄’이 끊겼다. 그나마 시설에 입소한 뒤 수급권자로 지정돼 구청 자활사업(청소)에 나가 50만~60만원씩 벌고 있다. 일이 없는 주말에도 새벽같이 용역 일을 나간다. 이렇게 번 돈의 일부는 자녀들 학비에 보태고 나머지는 저축하며 자립을 준비 중이다.
노숙인쉼터 관계자는 “쉼터 입소자들의 경우 실제 노숙을 하는 사람보다는 조만간 노숙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사회안전망을 통해 다시 자립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다”며 “노숙만성화의 본질적인 문제는 단순한 ‘주거의 상실(Homeless)’보다는 ‘희망의 상실(Hopeless)’에 있는 만큼,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퇴소 후 자립에 성공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쉼터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2006-11-13 01:00:43